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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나라의 몰락으로 본 민주주의
  •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9-05-31

 

민주주의의 뿌리를 논하자면 으레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등장한다. 'Democracy'(민주주의)의 어원 자체가 기원전 6세기 말 그리스에서 '데모크라티아', 즉 민중(Demos)과 권력(Kratia)의 합성어이니 여성과 노예가 제외됐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지칭함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순히 대중의 참여로 권력자를 뽑고, 대중의 뜻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제도 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에 앞서서 민주주의는 한 인간의 권리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 권리를 누구도 함부로 빼앗지 못함을 선언하며,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넓혀 가는 과정이었다.

 

즉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고 그 존엄함을 모든 인간에게로 확대해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고 보면 굳이 그리스에서만 민주주의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엷어진다. 수천년 인류 문명 시대, 세계 곳곳에서 있었던 인간의 존엄성의 깃발, 보다 많은 자유와 권리를 추구했던 역사 또한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전제 군주 하의 페르시아 제국이든, 수십 년 간 수십만 명이 피라밋을 쌓던 이집트에서든 민주주의의 단초는 발견될 수 있고, 그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역사는 가냘프게든 선연하게든 존재한다는 뜻이다.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인 황하 문명도 예외가 아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에 비해 황하 문명의 출발은 사뭇 늦었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5천년 전 이미 피라밋을 건설하고 있던 이집트 문명, 역시 기원전 2천5백년 경 흥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더스 문명에 비하면 천 년 이상 뒤진다.

 

삼황오제,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요순 시대와 그 뒤를 이은 하(夏)나라까지 이어지는 세월은 길었지만 전설 시대로 치부될 뿐이다.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왕조는 B.C. 1600년 경 세워진 상(商)나라였다.

 

 

 

상(商)나라의 몰락으로 본 민주주의 관련이미지1 

출처 : 위키피디아

 

 


원래는 이 상나라도 전설상의 왕조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 뜻밖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상나라는 역사적 실체로 부상한다. 문제의 유물은 바로 갑골문(甲骨文)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였던 은허(殷墟) 지역에서 밭 갈던 농민들은 오래된 짐승 뼈 조각이나 거북 등껍질 같은 것들을 자주 발견했다.

 

그럴싸한 유물이라면 즉각 골동품상 수중에 들어갔을 터이나 이 뼈 조각, 거북 등껍질 따위는 그럴 가치도 없어 보였고 이들은 주로 한약방에 팔린다. ‘용골’(龍骨), 즉 용의 뼈라 하여 약재로 팔린 것이다.

 

그런데 학질에 걸렸던 청나라 학자 왕의영이 하인을 시켜 이 용골을 사 왔는데 뜻밖에도 거기에 새겨진 무늬(?)들이 옛 한자임을 발견한다.

 

왕의영은 약재상들에게 소문을 내 글자가 새겨진 ‘용골’을 높은 가격으로 매입하겠다고 소문을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약재상이 용골들, 즉 문자가 새겨진 갑골들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왕의영과 그 후학들은 갑골문을 분석하여 해독해 냈고 그 기록들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대조해 본 결과 상당 부분 맞아 떨어지면서 상나라는 역사 시대로 편입된다.


상나라 남부의 제후들이 진상한 거북 등딱지와 목축을 통해 얻은 소 어깨뼈에 새겨진 문자 즉 갑골문은 지금까지 “16만 편 정도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서 약 5천여 자의 글자를 찾아내었으며, 해석 가능한 글자 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약 1천여 자 정도 된다.”(오마이뉴스 2007.5.9, “3300년 전 갑골문의 시대로 가다”) 갑골문 내용은 천문 현상에서 인간사의 다양한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망라한다.

 

이것은 당시의 왕이나 통치자들이 무슨 일을 시행할 때마다 천명을 따라, 즉 점을 쳐서 결정한 탓이었다.


“왕께서 장차 코뿔소를 활로 잡으러 가셔도 재해가 없을까요?”라는 갑골문에서 우리는 코뿔소가 오늘날의 중국 하남성 일대를 활보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고, “상제께서 지금부터 4일 뒤 저녁에 이르러 비야 내려라 명령하시겠습니까?

 

왕이 점괘를 보고 해석하신다. 정(丁)일에 비가 온다.”는 기록에서 왕이 점을 치고 해석하는 역할도 했음을, 또 우리가 쓰는 육십갑자가 그 시대에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갑골문 가운데에는 상당히 무섭고 엽기적인 질문(?)의 양도 많다.


“강인(羌人 : 상나라 주변의 이민족) 50명의 목을 잘라 올릴까요?” “사람 5명의 목을 잘라 제사를 지낼까요?”

 

“여자를 태워 제사를 올리면 어떨까요?” “강인 100명과 양 100마리는 어떻습니까?” 등등 오싹해지는 내용들인데 상나라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번성했던 아즈텍 제국처럼 숱한 전쟁을 통해 포로를 확보하고 그 인신공양을 통해 자신들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붉을 적(赤)자의 원형은 불 위에서 사람을 태우는 모습으로부터 나왔고 백성 민(民)의 원형은 눈을 빼는 처벌을 받은 노예를 뜻하는 상형문자였다. 상나라 시대의 유적에서는 목 없는 시신들이나 목만 남은 시신들이 쏟아져 나온다.

 

발견된 갑골문상으로만 추정해도 1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신공양의 희생양이 됐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죽어갔을 것인가. 전쟁 포로나 이민족을 주로 썼다지만 그들이 모자라면 노예나 상나라 백성들도 제물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잔인함이 절정에 이른 것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이다 이 사람은 거슬리는 신하들에게 시뻘건 숯불 위에 놓인 구리 기둥을 걷게 했다. 기둥에는 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신하들이 미끄러지거나 뜨거움에 못이겨 숯불로 떨어져 끔찍하게 죽어가는 비명을 즐긴 엽기남이었다.

 

귀천을 넘어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대, 거북 등딱지와 소뼈에 새겨진 점괘로 수백 명이 동시에 목이 잘려나가 제물이 됐던 상나라의 통치를 마감한 것이 주(周)나라였다.


상나라 주왕의 학정에 반기를 든 주나라는 상나라의 끊임없는 전쟁과 인신공양에 질려 버린 이웃 나라들과 합세하여 동맹국을 결성, “절굿공이가 핏물 위에 떠다니게 만든” 목야대전(牧野大戰) 이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 시대를 연다.

 

이 사건의 주역들, 즉 유명한 강태공이나 그가 도왔던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 왕과 귀족들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점괘에 좌우되지 않았다.

 

점괘가 나빠도 “점 따위가 군대를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부르짖으며 군대를 전진시켰다. 또 <주서>는 이렇게 딱 잘라 말하고 있다. “하늘은 오직 덕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를 두고 <춘추전국 이야기>(위즈덤하우스,2010)의 저자 공원국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은 귀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세계에는 인간 행위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공원국은 이를 두고 ‘주(周)의 인간혁명’이라 표현한다.

 

“서민들에 대해서는 정치를 너그럽게 하였고, 일반 관원들에게는 녹봉을 배로 올려주었다.”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처럼 주나라 대에서는 인신공양, 즉 사람으로 제사 지내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더 후대로 내려가면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 근거가 주나라의 법, 즉 주례(周禮)였다.

 

 

 

상(商)나라의 몰락으로 본 민주주의 관련이미지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원전 7세기 사람인 송(宋) 양공(讓公)이 사람을 희생양으로 썼을 때 그는 “가축도 제사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서 희생으로 쓰는데 사람을 희생으로 쓴다니 양공은 패자가 되기는 커녕 제 명에 죽기도 어려울 것이다.”(공원국, 위의 책)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가축도 제사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다.’는 것이 바로 주례(周禮)의 규정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송 양공은 강물을 건너며 흐트러진 적을 보고 ‘군자는 적의 약점을 노리지 않는다.’며 정정당당하게(?) 싸우다가 낭패를 본 고사인 송양지인(宋讓之仁)의 주인공인데 상나라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는 조상의 못된 습속을 버리지 못했고 사람을 제사로 쓰는 데에는 어짊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결국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덧나 죽었다.


주나라 역시 노예제 사회였으나 상나라 시절 수시로 제사에 목을 내놓아야 했던 노예들에 비해 처우가 개선됐고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면 노예 출신이 천하를 주무르는 재상이 되기도 한다. 제나라 환공을 도왔던 관중(管仲), 친구 포숙아와 나눈 돈독한 우정과 관련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이 바로 노예 출신이었다.


인간을 조상에 대한 제물로 바치고, 그 제물 확보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다시 그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던 시대는 주나라 대의 ‘인간혁명’(공원국의 표현)을 통해 바뀌어 갔고, 노예도 재상이 될 수 있었던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천년 이상 뒤처져 성립한 황하 문명, 중국 문명은 급속히 발전하여 다른 지역에 손색이 없는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영역을 구축해 가게 된다.

 

중국의 역사는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가치를 보다 많이 발견하고 인정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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