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다시 초록빛의 풀이 자란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 크라쿠프로 향하는 5달러짜리 버스 안에서 고민에 눈이 침침해졌다.
마침 싸게 뜬 버스표 덕에 폴란드로 가기로 결정은 했건만, 이곳에는 대체 뭐가 있는지도, 나는 어느 곳을 여행할지도 뭐하나 정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능숙한 배낭여행자가 된 나에게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터미널 근처의 호스텔에 짐을 풀고, 숙소 앞의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잔뜩 산 뒤 배낭 속 품어 놓은 간장과 쌀을 꺼내어 냄비 밥을 짓고 야채볶음을 만든다.
갓 지은 밥 한 솥과 윤기가 도는 야채볶음을 저녁 시간이 오기 조금 전 미리 만들고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오후 내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굶주림에 헐벗은 여행자들이 하나둘 숙소로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 상을 차리고는 식사에 초대한다.
“안녕! 난 한국에서 왔어. 혼자 여행 와서 친해지고 싶어서 한국식 요리를 준비했는데 같이 먹지 않을래?”
형식적인 말로 운을 띄운 후, 오늘 어디 다녀왔는지, 이곳에는 무엇이 재밌는지, 또 어떤 밥집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지 우리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수다를 떤다.
‘크라쿠프는 아우슈비츠 때문에 들른 거야!’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친구는 여행사를 끼는 투어는 시간이 짧아 좋지 않다며 아유슈비츠(오시비엥침)까지 가는 버스와 그곳에서 또 어떻게 가는지, 분명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며 이것저것 메모지에 잔뜩 글을 적어준다.
다크투어리즘1 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문득 떠오른 인생은 아름다워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본 회색빛의 잔상들이 벌써부터 마음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채비를 했다. 카메라를 챙기고 친구들이 준 메모를 다시금 꼼꼼히 읽으며 좁은 밴 버스에 몸을 부대끼며 선잠을 청하니 어느새 오시비엥침이라고 외치는 기사의 목소리에 나를 깨웠다. 꽤 따뜻한 날씨와 달리 어쩐지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내리니 드넓은 수용소가 펼쳐졌다. 녹슨 철조망 뒤로 푸르른 풀들이 펼쳐진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아우슈비츠를 온전히 걸어 내려간다.
비석 위에 놓인 아직 시들지 않은 꽃 한 송이 앞에서 그들과 같이 기도를 드려본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 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양심이니 평화니 반전이니 우애니 이 신발들은 이런 것들을 가르친다지만 어쩌면 이 신발들은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경림, 아우슈비츠의 신발들 중
사진 속 똑같은 옷을 입고 싱그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벽들에 잔혹하게 남은 바래어진 손톱자국들을 지켜본다. 무더기로 쌓인 같은 무늬의 옷들과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지켜본다. 이제는 멈추어버린 녹슨 기차를 바라본다.
이곳은 아무리 걸어도 내 짧은 다리로는 끝이 없다. 끝이 없는 이곳을 누군가들은 집을 그리며 애처로이 거닐었을 것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 앞에는 독일인들과 이스라엘 무리가 함께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본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크라쿠프와 대조되는 적막함 속을 걷다 문득 땅을 보았다. 철조망 바로 뒤의 푸른 풀 속에 가녀리게 핀 들꽃 무더기가 낮은 바람에 날려 고개를 까딱까딱한다. 마치 침울한 표정의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참 어여쁘게도 피어났다.
꽃을 보며 안도하는 표정의 사람들, 죄스러운 표정의 사람들을 나는 바라본다.
차가운 이곳의 땅에도 여전히 햇볕은 들고, 풀과 꽃들은 푸르게 피어나고, 낮과 함께 찾아 들어온 따뜻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주고 있다.
이곳에도 다시 초록빛 풀이 자랐다.